서론
한복(韓服)이 한민족 고유의 전통 의상이라는 데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것을 ‘중국산’으로 둔갑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2022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중국 단원으로 등장해 이른바 ‘한복공정’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Kimchi·Hanbok·Spinning the hat”, 2022).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서 '한복'((K)Hanbok)이 한국의 전통 의상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자신들의 것이라며 주장하는 행태를 우리의 역사를 빼앗으려는 ‘동북공정’에 빗대 ‘한복 공정’이라고 부른다(“They said gat is theirs”, 2022)
한복은 한민족 고유의 의복에 대한 총칭으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이다(Lee & Son, 2021). 1600여 년간 이어진 고유 한복의 전통성은 세계에서 제일 길며,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4∼6세기)와 신라·백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00). 전통의 선을 현대부터 그어보면, 영·정조시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에 나타난 한복까지 그을 수 있으며, 다시 조선 초기·고려·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 고분벽화의 기본복(유·고·상·포)까지 이어지며 고조선까지도 이을 수 있다(Kim, 2000). 반면에 좁은 의미의 한푸(漢服)는 한나라(漢朝)의 복식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고대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한족이 입었던 모든 옷을 지칭한다(Lin & Suh, 2016). 오늘날 한푸의 의미는 좁은 의미보다는 넓은 의미의 한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며, 화복(華服), 한장(漢裝)이라고도 불린다.
중국의 한푸(漢服) 주장, 즉 한국의 전통 한복이 중국의 전통 의복이라는 주장은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 백과사전에 ‘한복은 한푸(漢服)에서 기원했다.’고 왜곡하고 있으며, 중국을 대표하는 전자제품 기업인 샤오미 스마트폰 배경화면 스토어에서는 한복을 ‘중국 문화(China Culture)’로 소개해 큰 논란이 된 사례가 있다. 또한 미국의 유명 패션지 보그(Vogue)는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한복풍 의상을 착용한 중국인 유튜버 ‘시인’(Shiyin)의 사진을 올리며 해당 의상을 ‘한푸’라고 소개했다. 보그는 해당 의상을 “한족이 통치하던 시대의 옷으로 정의된다.”라며 “중국에서 더 진정한 형태의 역사적인 옷으로 여겨진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웨이보에서는 #한푸하스의 조회 수가 현재까지 48억9000만 회를 넘었고, 중국 틱톡(두인)에서는 한푸 영상이 477억 회 이상 조회됐다.”라며 “현재 이 운동은 유행에 민감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한푸 마니아는 2019년 356만 명에서 2020년 60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덧붙였다(“Vogue introduced Hanbok”, 2022)
또한 중국의 한 게임 회사와 관련한 논란이 한복의 국적 싸움이 된 사건이 있다. 중국의 게임 제작사 페이퍼게임즈의 ‘샤이닝니키’가 공식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 서비스에 한복 콘텐츠를 출시하자 엉뚱하게도 중국인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The shadow of ‘China’s Northeast Project’”, 2020). 중국 유저들은 “한복은 중국의 명(明)나라 의상”,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조선족의 옷” 등의 주장들을 펼쳤다. 그러면서 우리의 한복을 중국의 ‘한푸(漢服)’라고 가리켰다. 한국 유저들은 분노하였고, 중국 유저들의 주장에 한국 유저들이 반박하면서 싸움은 지속되었다. 또 많은 중국 누리꾼이 SNS에서 “한국이 한복을 훔쳐 갔다.”는 어이없는 왜곡을 하고, 심지어 '갓'까지 자신들 것이라고 하는 억지 주장을 펼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중국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한복공정’은 꾸준히 진행되어 온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지금부터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또한 최근 케이팝(K-Pop) 인기 가수들이 한복을 활용한 무대 의상으로 인기를 끌어 한복에 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진 상황이다. 이러한 논란들은 오늘날에서야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중국은 꾸준히 우리나라의 많은 콘텐츠를 표절하여 자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어왔다. 국가적 차원의 ‘저작권 인식’ 부족인 셈이다. 이제는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며, 국내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더욱 견고하게 자리 잡을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한푸는 무엇이고 한복과 한푸의 차이는 어떻게 될까? 한복은 왜 우리나라 고유의 것인가? 이런 논점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에 의하여 논리적인 해답이 필요하다.
최근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한복 사건과 더불어 시의성이 있는 본 연구를 통해 우리가 단순히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한복은 한국의 전통 의상’이라는 진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하겠다. 본 연구의 목적은 중국의 ‘선전공정’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한복과 한푸는 완전히 다른 복식이라는 근거와 우리 전통 한복만의 특징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한복-한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복이 중국 명나라 옷이라는 일부 중국인들의 왜곡된 주장들을 반박하고 한복이 한국의 고유 문화유산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한복과 한푸의 실루엣의 차이점, 원단의 차이, 패턴 및 제작방법의 차이, 바지의 유무, 디테일 등에서 큰 차이점을 갖고 있으므로 이에 관한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론적 배경
2.1. 한복의 선행연구
한복에 대한 최근 국내 선행연구를 살펴본 보면, Choi (2019)는 새로운 한복의 디자인을 분석하기 위해 온라인 판매 한복, 신한복 프로젝트의 한복, 잡지 스타일링 한복을 수집하여, 대표 아이템인 저고리, 치마, 바지, 외투의 4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각각의 디자인 특성을 분석하여 새로운 한복의 디자인 특성을 도출해내고자 했다. Cha et al. (2020)는 커스터마이징 시스템 개발을 위한 신한복 치마 패턴 개발의 기초자료를 얻기 위해 신한복 브랜드의 치마 패턴을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또 Cha et al. (2021)은 신한복 저고리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통해 추출된 신한복 저고리 디자인을 기본으로 하여 신한복 저고리 원형을 개발하였다. 또 한복의 디자인 개발에 관한 연구가 다수로 나타났다. 특히 ‘∼를 응용한’, ‘∼를 사용한’ 한복 디자인 개발 연구가 많았다. Kim & Kim (2018)은 십이지 동물을 활용한 생활한복 스타일의 유치원복을 제작하였다. Kim & Kim (2019)은 후백제 기와문양을 응용한 영유아의 생활한복 디자인을 개발하였다. Lee & Lee (2019)는 한복 열풍의 트렌드에 맞춰 청년 문화를 대표하는 데님 소재와 우리나라 전통 조각보 이미지를 활용하여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대를 융합한 개념의 생활한복 디자인을 전개하였다. Choi & Shin (2021)은 전통문양, 생활한복, 커스터마이징에 대해 알아보고, 전통문양을 이용한 생활한복 커스터마이징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개성이 담긴 생활한복을 제작 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하였다. 이상과 같이 ‘한복’ 의 핵심적인 아름다움 관련 연구가 많이 부족하며 한푸와의 차이점 분석 및 타당한 증거를 제시하는 한복의 정체성 관련 연구는 미비하였다. 한복 동북공정 사건을 계기로 시의성과 창의성이 있는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하였다.
2.2. 한푸의 동북공정
한푸에 관한 국내 선행연구로, Lin & Suh (2016)는 <영웅(英雄)>, <연인(十面埋伏)>, <적벽대전(赤壁)>, <야연(夜宴)>,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狄仁傑之通天帝國)>의 영화 사례분석을 통해 시대극 영화 의상의 미적 특징을 도출하였는데 전통적 요소의 재현, 강렬한 색채의 대비,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 변형, 과장된 복식의 형태, 이질적인 소재의 결합이 특징이다. 이들 미적 특징을 활용하여 한족 전통 복식인 한푸의 디자인 요소인 오른쪽 여밈, 끈 여밈, 복식 형태, 소매 형태를 디자인에 적용하여 현대적인 패션디자인을 제시하였다(Lin & Suh, 2016). 그러나 여기에 소수민족이나 동이족의 의상도 출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Xiao & Choi (2017)는 '뮬란'이라는 동일 소재를 바탕으로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표현된 한푸의 색채를 비교 분석하였다. 디즈니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뮬란은 오방간색을 사용하여 백성을 표현하고 분홍색, 빨간색과 파란색을 사용함으로써 오방간색 중에서도 원색에 가까운 색깔을 사용하였고 실사 영화에서의 뮬란은 오방간색 중에서 갈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었다(Xiao & Choi, 2017). 그런데, 한나라는 전쟁용으로 쓸 말도 없어서 일반 인 집에서는 말 기르기는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었다. 반면에 북이족과 친밀했던 동이족은 일반인들도 말이 흔했었다. 또 고구려는 일반인들이 주로 착용하는 바지는 흰색으로 입었고, 상의로는 갈색과 파란색을 주로 착용하였다(Kim, 2004).
Zheng & Lee (2019)는 중국 전통 여성 한푸의 유형과 특성을 고찰하고, 현대 여성의 한푸 스타일을 분석하여 전통 한푸의 활용 사례를 범주화하고 현대 한푸의 특성을 규명하였다. Chen & Suh (2021)는 중국 한푸의 특징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여 새로운 힙합 스타일의 디자인 개발을 목적으로 창의적 발상 기법인 스캠퍼 기법을 활용하여 현대적인 남성복 패션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디자인 개발 연구를 통해 한푸의 심의, 포, 유, 오, 삼, 배자, 반비, 비갑, 고와 군의 구조와 ‘상의하상’, ‘교령우임’, ‘길고 넓은 소매’ 그리고 ‘끈 여밈’ 특징 그리고 다양한 전통문양을 현대 패션디자인에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Chen & Suh, 2021). 그러나 Chen & Suh (2021)의 연구는 현대 동북공정작전 또는 허위 주장으로 여겨지는 요소를 드러내고자 함을 알 수 있었다.
국내에 게재된 논문 4편을 파악한 결과 모두 중국 학자가 저자였으며 한푸 디자인을 분석하여 현대 패션에 적용한 사례였을 뿐이다. 한복과 한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본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보기 어려운 한복의 뿌리와 한푸의 차이점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연구방법
광의의 한푸는 청나라 초기까지의 옷이라고 하는데(Lin & Suh, 2016), 한족이 아니라 북방 선비족이나 만주족이 지배한 당시의 중국 패션은 제외시켜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5호16국시대, 수당, 원, 청 등은 북방민족, 강저족, 갈족, 선비족 등이 지배한 시기이므로 이때의 복식은 제외시켜야 진정한 한족의 복식, 한나라의 한푸(漢服)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나라시대의 복식을 한푸로 규정하고 이와 한복과의 차이점을 조사하기로 한다.
연구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연구방법으로 질적 연구 방법으로 문헌조사 및 사료검증을 병행하였다. 고대 유물복식의 발굴 자료와 도록 보고서를 포함한 선행논문, 복식사 서적, 유물관련 시각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문헌조사는 관련 논문, 도서 자료, 인터넷 조사 및 원단의 특성을, 사료검증은 유물 시각자료로 사진과 그림, 고분벽화와 회화, 인터넷 조사 등을 포함하였으며 고문헌을 조사할 때는 절차적 삼단논법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고대로 동북아 역사서들은 당대의 석학들이 황제의 통치 이념에 따라 글을 잘 못써서 맞이할 수 있는 필화(筆禍)를 피하기 위해 모호하게 기록해 놓아서 결정적 단서는 찾을 수 없으나 지나온 자취와 정황(情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시, 서, 역경 등에 우리 고대사가 숨겨져 있다. 글자를 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어 놓는 것을 번체(繁體) 또는 주서(朱書)라고 하며, 가차(假借)란 해를 숭상하던 민족의 말소리를 빌려서 글자를 썼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서를 읽을 때는 절차적 삼단논법을 이용해서 살펴보아야 한다(Lee, 2016). 예를 들어, 서경에는 ‘오랑캐와 산적이 패를 짠다(厥匪織貝)’ 라고 쓰여 있는데, 시경에는 ‘貝란 錦이다’ 라고 쓰여 있다. 얼핏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이를 절차적 삼단논법에 의하면, ‘동이족과 북이족이 색동 (경)금 비단을 짠다’ 로 해석이 됨으로써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Kim & Na, 2022).
연구결과
4.1. 문헌에서의 증거
중국에서 한복을 명나라의 복식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명나라의 복식이 한국의 한복과 상당 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나라 복식 ‘한푸’란 고려의 복식이 전달되어 크게 유행하였던 고려양식인 ‘고려양(高麗樣)’이었다(Figure 1). 고려양이란 13세기 중엽 이후 원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음식과 옷이 유행한 현상을 말한다. 문화 수준을 보면 고려가 몽고가 세운 원나라보다 높았다. 고려가 몽고 원의 침입을 받은 이후에 선물과 처녀들을 원나라로 보내었는데 이를 통해 고려의 의복 · 음식, 그 밖의 문화양식이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며 명나라 초기의 복식은 당연히 고려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명나라 복식이 한국의 한복과 상당히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도 ‘고려양’에 대한 증거가 많이 남아있다.
① 원나라의 翰林學士(한림학사) 장욱(张昱)의 <궁중사>를 보면,《张光弼诗集》卷三《宫中词》: “宫衣新尚高丽样,方领过腰半臂载,连夜内家争借看,为曾着过御前来。” “궁중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것은 고려양이라네. 방령에 짧은 허리, 반소매 궁중 여인들이 밤까지 이어져 구경하려 하네, 이는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 이 옷을 입고 왔기 때문이라네.” 라는 위 문헌은 궁중의 일을 읊은 노래 <궁중사> 21수 중의 하나이다. 이에 따르면 원나라에 고려의 복식이 유행하였음을 증거한다. “짧은 허리, 반소매” 즉 한복의 저고리 형식과 반비 저고리가 중국 사람들이 원래 착용하던 긴 원피스 형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고려양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에서는 짧은 상의와 반소매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② [속자치통감] 214권 원나라32년《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 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 미인으로 삼아, 대신과 권력 있는 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 귀인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후에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의 일을 하는 사령 대반이 고려 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 것을 고려를 모방하는데, 온 세상이 미쳐버린 것 같다.” 라는 내용은 속자치통감 문헌중 원나라 조에서는 원나라 왕실이 고려 여인을 미인 이상형으로 삼은 내용으로, 고려 복식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였고, 모든 사람이 고려의 모든 것들을 따라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③ [숙원잡기]《菽园杂记》: “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 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됐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 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많이 입게 되었다. 각로 모두가 공, 사,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 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재위 : 1487년 ~ 1505년) 초기에 금지되었다.”라는 내용의 문헌에 따르면 풍성한 실루엣의 고려양이 지속적으로 크게 유행하자 명나라의 9대 황제인 홍치제가 금지했다는 것이다. 마미군(馬尾裙)은 고려의 속치마로, 유럽의 크리놀린처럼 말총으로 만들어 실루엣을 크게 부풀릴 수 있도록 하는 옷인데 이것이 명나라 궁중에서 남녀노소 대유행을 하였던 것이다. 이 문헌은 명나라 학자 육용(陆容)(1436-1494)이 편집한 [숙원잡기] 정사이며, 이에 의하면, 명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양’은 요사스럽다고 여겨졌고 이러한 고려양식 복식을 좋아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고 마치 미쳐버린 것 같다고 크게 한탄을 하였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아름다움이 유행하는 ‘조선류’도 존재했었다. 조선의 여인은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미인으로 대우받았으며 이는 역사적 문헌에도 기록이 있다.
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비는 조선 사람으로, 영락 7년 5월 (1409년) 조선에서 들여보낸 여인인데, 액정을 채울 때 권비도 여러 여자를 따라 들어왔다. 임금이 권비의 하얀 얼굴에 체질이 순미(純美)함을 보고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묻자, 권비가 가지고 있던 옥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 소리가 요묘(窈渺)하여 멀리까지 메아리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바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이 선발했다가 한 달쯤 지나 현비(賢妃)로 책봉하고 권비의 아버지 영균을 광록경으로 삼았다. 권비는 고려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의 딸로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궁중에서 앞다투어 서로 배웠다.” 라는 내용의 문헌은 청나라 문인이었던 모기령 毛奇齡(1623-1713)의 기록이며 현비 권씨가 매우 아리따운 매력에 퉁소까지 잘 불어 황제의 총애를 얻자 궁중의 모든 여인이 퉁소를 따라 불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권씨의 미모뿐만 아니라 조선의 문화는 명나라의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음을 재확인하였다.
②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명나라 “영락제(1360-1424)는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고 명했다. 황제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내관 해수(海壽)가 원민생에게 ‘좋은 처녀 2명을 조선에서 진헌하라’ 했다. 그러자 황제가 기쁘게 크게 웃으면서 명하기를,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숙한 시비(侍婢) 5∼6인도 아울러 뽑아 오라’고 하였다. 라는 내용의 문헌은 영락제는 입맛이 없을 때 조선의 음식을 찾고, 그의 신하들은 조선의 여인을 데려와서 영락제를 기쁘게 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영락제는 조선의 음식과 여인들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양과 조선류는 과거의 한류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많은 왕조들은 한국의 문화와 미를 높게 평가했으며, 한복 또한 이런 흐름을 통해 중국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4.2 실루엣의 차이
4.2.1 풍성한 주름치마의 유무
한복은 치마가 풍성한 형태를 띠며 볼륨감이 크다. 이는 한복 치마의 풍성한 볼륨감 실루엣은 주름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여러 폭의 옷감을 연결하여 풍성하게 만든다. 이와는 반대로 한푸는 옷을 휘감아서 착용하게 되므로 일자로 떨어지는 실루엣을 가지며 몸매가 비교적 드러나는 슬림한 형태를 이룬다(Figure 2). 이를 살펴보면 제도법이나 봉제법도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와 유사한 고분벽화인 일본 다카마쓰 고분(7세기말∼8세기초)은 고분 주인이 고구려 멸망 후 왜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추정이 유력한데, 여인군상도 벽화를 살펴보면 화려한 색동 주름치마에 엉덩이를 덮는 저고리와 고름, 다양한 색상의 허리띠 등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Figure 3).
삼한의 한(韓, Khan)과 한(漢, Han)은 K가 묵음이라서 그 발음이 유사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이 발음을 먼저 사용하였는가?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은 한나라 건국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는데, 고조선은 사방 4천리 광대한 영역을 갖는 삼한(三韓진한, 변한, 마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한복’이 ‘한푸’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 Khan’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라는 뜻이며 ‘크다’라는 순우리말이기도 하다. 한 고조 유방은 구려의 천자이자 전쟁의 신이었던 치우에게 제를 올리고 전쟁에 임하였다고 한다. 전쟁에서 항우에게 계속 패배하였으나 북맥(부여)과 연나라가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도와주었기에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北貊燕人來致梟騎 助漢 사마천 사기 및 응소). 그래서 유방은 한(韓)과 유사한 발음인 한(漢)으로 국명을 삼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고조는 많은 단어 중에서 왜 하필이면 ‘한’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던 것일까? 뜻글자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들도 소리글자를 사용하는 태양족 동이족을 모방하여 동일소리의 단어를 갖다가 기록하였는데(假借) (Lee, 2016), 한 고조 유방은 삼한의 어떤 점을 부러워하여 국명을 ‘한’나라로 명명하였을까 연구해 볼 문제이며 문맹률이 현저히 낮은 곳의 문화수준이 어떠할지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겠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복과 한푸는 실루엣이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는 첫째, 고대부터 중국 한족의 미의식이 가느다랗고 슬림한 것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의 미적 기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의복에서 실루엣은 중요한 요소이다. 중국은 슬림한 실루엣을 고수해 왔으며, 현 중국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미인상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른 몸매의 여성이다(Seo, 2020). 두 번째, 한국은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치마를 풍성히 착용했고, 겹겹이 착용하는 속옷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속속곳 → 바지 → 단속곳 순으로 속바지를 적어도 2개 이상 입었고 겉옷인 단속곳만을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여기에 속치마를 입고 겉치마를 착용하였는데(Figure 4, Figure 5), 본래 이렇게 일곱 겹을 갖춰 입은 후 겉치마를 입는 것이 고위층의 정식적인 옷차림이었다.
따라서 한복은 자연히 풍성한 실루엣을 가질 수밖에 없다. 치마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6폭부터 시작하여 넓게는 12폭까지 연결하여 치마를 풍성하게 제작하여 넓게 착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를 착용하면 전체적으로 풍성한 종 모양의 실루엣을 형성하고, 한푸의 슬림한 실루엣과는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된다.
4.2.2 염색성이 돋보이는 원단과 실크의 기원
풍성한 실루엣의 한복과 유연한 실루엣의 한푸는 원단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동이족 복희씨(羲皇: BC2800)가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아 겉보기에 거친 견직물(惠帛)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추위로부터 몸을 지키게 해주었다고 한다(路史前記). 거친 견섬유 또는 세리신을 제거하지 않은 견섬유는 마섬유와 같이 뻣뻣한 실루엣을 만든다. 또 마두낭(馬頭娘)의 실크 기원의 내용을 보면 주인집 딸을 사랑하다가 죽임당한 말의 가죽에서 실크 고치가 발생하였다는, 즉 북방 기마민족의 평민이 사는 집에서 실크가 기원했음을 의미하는데 비교적 남방의 한족은 말이 무척 귀했으며 일반 여염집에는 말이 없었다.
신석기 초기 요하문명(BC8000∼)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BC4000∼)은 고조선(BC2333∼)과 밀접하다. 홍산문화에서 옥으로 조각한 누에 즉 옥잠(玉蠶)이 많이 출토되는데, 고고학적으로 홍산문화 여러 지역에서 실크 관련 출토품이 발견되고 있다. 고조선은 홍산문화의 발굴로 인해 그 존재가 확실시되었다. 하가점 하층문화(BC2500∼)의 주인으로 볼 수 있는 고조선은 청동기 시작의 국가 단계이었다. 이 지역은 야만인의 땅이라고 중국인들이 불러왔던 곳이며, 이 지역 이 시기에는 어떠한 중국 왕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홍산문화가 속한 요하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약 1500년이 이른 것으로 판명됨으로써 갑골문자보다 더 이른 문자를 비롯하여 옥기와 실크 관련 유물, 청동기 유물 등 많은 유적이 고조선 존재의 증거가 되고 있다(Shin, 2018). 하늘에 대한 제사 의식과 청동기에 새겨진 문양 및 실크 문양을 통해서 고조선인의 정신적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데, 하늘을 두려워하는 제천사상과 축제, 또 길흉을 점치는 뼈 도구나 갑골, 청동기 제기 등 정신적,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은 의생활 수준과도 밀접하다고 본다.
견섬유, 마섬유, 면섬유 과 같은 오래된 섬유의 제조는 준비하는데 많은 수고로움이 필요하므로 선조들의 근면, 성실, 가치관 등과도 상관이 깊다고 본다. 신석기시대의 뼈 북, 뼈바늘, 뼈바늘통이 발굴되어 일찍이 바느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오한기 조보구유적의 홍산문화는 세계 최초의 옻칠을 발명하였었고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요령성 심양부근의 신락유적에서는 채색질 그릇과 함께 붉은색, 검은색 염료가 출토되었다. 흑룡강성 목단강 해림현 자하향 암각화에는 적색과 자색의 광물성 안료가 사용되었었다. 즉 신석기시대부터 질그룻에 채색을 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의복에 물을 들이는 등, 염색기법에서도 독창성을 보였다(Park, 2011).
평양과 최씨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양의 다양한 종류의 출토 사직물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갈색, 자주색, 문양이 있는 것, 수 놓은 것, 붓으로 그린 것 등 다양하다. 고구려에서는 오색실을 물들여 선염으로 짠 경금(經錦)이 있었으며, 후염도 다양한 방식이 있어서 화려한 색상의 의복착용을 가능케 했는데, 염색법으로는 홀치기염, 납힐기법, 채회기법, 사협힐기법 등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자지힐문금(紫地纈文錦)을 최고로 치고 다음이 오색금(五色錦), 그 다음은 운포금(雲布錦)이다(翰苑 蕃夷部 高(句)麗條). 白錦은 중국에서 그 제직기법을 배워가기도 했다(舊唐書). 고려금, 백금, 한금(韓錦), 조하금(朝霞錦), 조하주(朝霞紬), 어하주(於阿紬) 등은 중국, 일본 등지에 수출하는 특산물품이었다(Min, 1995, 1998).
나라시(奈良) 경금에는 고려금, 능형금(菱形錦), 조금(鳥錦), 귀갑금(龜甲錦), 정형금(町形錦), 차천금(車釧錦), 화형금(花形錦), 운번금(雲幡錦), 소화금(小花錦), 고금(고금)등이 있다(Kim, et al., 2021). 고구려 사람들은 금(錦)을 입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변진에서는 잠상과 마포, 면포, 겸포(縑布)와 광폭세포(廣幅細布) 제직기술을 갖고 있었다(Park, 2011).
Figure 6은 일본 정창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우리 보물인데, 옷감이나 색상, 반소매저고리 등 많은 내용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나라시 정창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7-8세기 신라 민소매 한복은 비교적 두꺼운 경금이며 여러 겹으로 제작한 것이다(Figure 5). 우리 한복의 원단에는 중국보다 강직한 원단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의는 땅까지 내려 오지 않고 허리에는 띠를 매어 활동성을 중요시한다. 양직공도를 보면 고구려 사신의 상의에서 청동 단추가 달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단추를 의복에 장식할 수 있다는 것은 원단이 상당히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량의 평직직물명 ‘차이나 실크’ 와는 완전히 다른 원단이다(Kim & Na, 2022). 정창원 남창 121(正倉院南倉121) 제4호(第4号)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반소매 반비를 보면 색상이 매우 화려하다. 일찍이 염색성이 우수하게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데(Park, 2011), 상의 안에서도 색을 여럿 사용하였듯이, 한복에서는 상/하의를 서로 반대색으로 착용하여 더욱 화려함을 이루곤 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직기의 차이는 제작할 수 있는 원단의 차이로 이어진다. 한국식 직기는 중국 한나라 직기와 달리 잉아를 들어 올리는 구조가 다르다. 따라서 생산할 수 있는 직물의 형태가 다르다. 한나라 사직기는 한국식 수평형 직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경사도가 매우 가파르다(Shin, 2012). 이와 같은 사직기는 곡선무늬의 자카드직의 비단(錦)을 짜기가 불가능하며, 복잡한 곡선 문양의 금 원단을 직조하기 위해서는 수평형 직기, 화직기, 제화루 만이 가능하다(Kim, 2021).
동이족은 토착민이며, ‘산동반도 래이(萊夷) 동이족이 생산한 야잠견, 생견사를 바구니에 담아서 특산품으로 가져온다’ (우공 한서지리지) 라는 기록이 있다(Min, 1998). 또 <단군세기>는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선조가 견사를 사용했으며 초대 단군은 왕후에게 잠상을 맡기고 백성들에게 이를 권장하였다(Kim, et al., 2021). 오랜 세월동안 동이족 한민족의 왕후들은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기르고 고치를 생산하는 길쌈을 담당해왔는데, 1대 단군(檀君) 왕후부터 국가에서 관장하는 의복과 양잠 기술은 백성의 생활 영위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계승되었다. 여성 지도자 왕후들이 담당한 국가적 양잠 산업은 과히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양잠이 장려되었고 부흥되었음은 충분한 기록이 뒷받침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기원전 17년)는 왕비와 6군을 순찰해서 농잠을 권장하였고 국가를 부유하게 세운 기록이 있고, 5대 파사왕도 뽕나무 농사를 권장한 기록이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도 농업과 잠업을 권장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신라의 경우인데 백성을 2조로 나누어서 베짜기 경기대회를 (음력 8월 15일) 벌인 것이다. 실크 산업을 국가 산업으로 지정하고 이를 권장하는 기념일로서 국가가 축제의 날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 관습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것이 추석 명절이다. 간단히 말하면, 섬유산업을 장려하기 위한 날로서 국가의 축제일을 정한 국가 민족은 한국 이외에 세계 어디에도 없다(Cho, 2012).
4.2.3 한복 투피스와 한푸 원피스의 차이
우리나라의 복식은 상유하고(上襦下袴) 즉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나라 복식은 샹이샤상(上衣下裳/shàngyīxiàshāng)으로서 상의와 치마를 입는 것이 중국 복식을 대표한다. 우리나라의 저고리는 삼국시대에 유(褕), 삼(衫), 의사포(衣似袍), 또는 위해(尉解)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위해’는 ‘위에’ 옷이라는 소리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 한복은 남녀 모두 하의 위에다 상의를 입는 형식이지만, 한푸는 남녀가 모두 원피스 형태를 둘러매는 형식, 치마위에 긴 겉옷을 입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는 상의 위로 치마를 입는 방식으로 변하기도 하였는데, 치마위에 상의를 입는 우리나라의 한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한푸의 한 종류라는 의상제(衣裳制, yīshang zhì)는 우리나라의 복식과 닮은 짧은 상의와 치마로 구성된 투피스 형태의 복식이다. 그런데 이 복식의 형태가 고려양이 유행하던 명나라 시기의 풍속도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한푸의 형태는 본래 매우 긴 상의와 치마, 혹은 원피스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피스 형식은 고려때 건너가 고려양의 유행으로 확산되었다가 홍치제의 고려양 금지로 점차 사라졌으나, 현재도 많은 한푸 형식은 긴 상의와 치마, 또는 원피스의 형태이다. 이는 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 등 북방민족이 중원을 차지한 시기가 한족이 차지한 시기보다 더 길기 때문이기도 하다.
4.3 상의
4.3.1 섶과 고름의 유무
고대 한국은 남녀노소 모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목선은 직령, 반령 외에 옷깃이 뒤집혀진 번령으로 집약되며, 여밈은 앞이 열린 전개형, 앞이 막힌 전폐형으로 구분되며 좌임, 우임이 혼재하였으며, 저고리와 두루마기 모두 가선 장식이 많이 활용된다(Kim & Chae, 2018). 저고리의 길이는 가슴선 아래부터 둔부선 길이까지 보였으며, 여밈은 대(帶) 또는 고름과 같은 끈이 달린 형태가 나타났다(Chae & Kim, 2016). 섶이란 한복 저고리 제작시 앞길이 맞닿기는 하지만 포개지지는 않는데, 두 장의 앞판이 서로 겹쳐지도록 중심선에 덧붙이는 작은 천을 말한다. 한복의 섶은 백제와 나라의 유물에서 명백히 발견할 수 있다(Figure 6c)
중국 복식에서 섶이 처음 나오는 경우는 명대(明代)부터인데, 이는 고려양의 영향으로 보인다. 한(漢)나라 옷에서는 옷깃 형태는 발견할 수 있지만, 섶을 덧대어 제작한 경우는 보기 힘들다. 한나라에서는 섶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옷을 휘감아 입으므로 앞단을 크게 따로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복은 앞/뒤판이 어깨선에서 붙어있는 북방 및 스키타이의 저고리 제작법과 동일한데(Figure 7a), 상의가 비교적 짧은 편이므로 섶만을 따로 제작하여 붙일 수가 있었다. 또 겨드랑이 무나 반/삼회장 저고리의 곁마기, 바지 가랑이의 큰 사폭과 작은 폭 등 효율성을 높인 제작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패턴과 의복 제조방법의 차이는 한복과 한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전통 의복인 반비에도 섶과 고름이 달려있다(Figure 6bc). 안섶에 달려있는 짧은 고름이 앞길의 좌측 옆선에 나있는 창구멍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고, 겉섶에 달려 있는 긴고름은 우임방향으로 몸을 둘러 앞길 옆선에 나와 있는 짧은 고름과 옆쪽에서 여며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Lee, 2020).
북방 기마민족은 오래전부터 말이나 가축을 묶기 위해서 각종 매듭이 발전하였는데, 한국은 섬세한 바느질 작업, '철(綴, 엮다)' 및 다양한 목적으로 고름을 붙임이 발달하였다. ‘마한도 잠상(蠶桑)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들며 철의(綴衣)로 치장을 하고, 금은금수계(金銀錦繡罽)가 비싸지 않았다. 영주(瓔珠)로 재보를 삼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 (삼국지 魏志 동이전). 즉 한복과 한푸의 큰 차이점은 고름이며, 한푸는 고름이 없이 옷 자체를 둘러서 매는 형태이다.
일본의 하니와 상의에 고름이 보이는데, 한복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고름이 정착해가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Figure 7b는 신장자치구 니야유적에서 발견된 2-5세기 추정되는 시기에 발견된 긴소매 저고리에도 섶과 고름이 달려 있다. 저고리의 선 장식은 어깨, 윗 팔, 도련, 앞 여밈 끝단, 소매 끝동과 등 뒤 중앙에서 관찰되는데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복식요소이며, 화려한 선 장식은 사회적 신분과 서열을 구분했던 복식요소라고 보고 있다(Chang, 2020).
4.3.2 대 帶- 허리띠
허리띠 장식은 이미 홍산문화의 유적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를 비롯하여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로 이어진다(Park. 2016). 고조선문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홍산문화(서기전 4500∼서기전 3000년)를 이은 소하연(小河沿)문화유적(서기전 3000∼서기전 2000년)에서 출토된 ‘인형방식(人形蚌飾)’에 보이는 의복양식을 살펴보면,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인형식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고조선시기 복식양식과 발전사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 유물자료로서 상투 머리양식과 의복양식 이외에 장식기법, 허리띠 양식, 문양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Park. 2016).
Figure 8은 신장 자치구 니야유적지에서 발굴된 2-5세기 추정되는 실크 소재의 허리띠를 나타내며 앞단에 단을 덧대어 완전히 덮어 입는 형식이며 허리에 대가 달려 있고 상당히 장식적이다(Chae & Kim, 2016). 풍성한 주름 소매와 바지 상하의는 한복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므로 고조선과 니야 간의 동서 교류가 매우 빈번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실크 등이 이동하였던 초원길의 존재로 가능하였다. 또 북방 스텝의 알타이계 언어 동질성은 물적 교류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가 빈번했음을 증명한다(Robbeets et al., 2021). Figure 9는 기원전 2000-1000년의 것으로서 신장 자치구에서 발견된 양모로 만든 허리띠이다. 아름다운 색동 색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수천 년이 지나도 복식에서 벨트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 한복에서 허리대는 필수적이었음이 짐작 가능하다. 대를 착용하여 허리가 조금 잘록해지더라도 헴라인의 폭이나 소매 형태를 보면 전체적인 실루엣은 풍성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천 년이 지나더라도 민속복의 실루엣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허리 대는 몸에 지니는 칼을 차기 위해서 필수적이며 북방민족들이 처음 착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한복은 벨트 고리의 소재가 청동, 옥, 뼈, 황금 등 다양하지만 한나라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대의 소재나 색상은 지위나 신분을 나타내었는데, 옥이나 금은 장식을 덧댄 가죽으로 만든 대도 착용하였듯이 다양한 대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대는 조선시대에는 도포, 두루마기 위에 가느다란 끈 형식으로 변하였고 관복에서는 초기 모습 그대로의 풍성한 사각 허리대가 남아있었는데, 이처럼 색과 재질을 구분하여 대가 함께 착용된 것을 통해서 한복의 전통적인 요소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4.3.3 댕기
댕기는 머리를 장식하기 위해 머리끝에 드리우는 장식용 헝겊이라는 의미로, 한자로는 당지(唐只), 또는 단기(檀紀), 단지(檀誌), 단기(檀箕)라고도 하였다(Kim, 2012). ‘당기’는 머리를 ‘당기는 것’이란 뜻으로 생긴 댕기의 옛 소리이며, 檀紀의 경우 단군 때에 처음으로 땋은 머리를 시작하여 끈이나 천으로 결발한 데서 유래하였다(Jang, 2002). 정약용의 풍속고(風俗考)에 “지금 아이들이 땋은 머리끝에 드리운 헝겊이나 실은 단계(檀戒), 단기(檀祈)라 하니, 이는 단군께서 백성들에게 머리 땋은 법을 가르치시고 신령한 성품 닦기를 훈계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신덕(神德)을 추모하여 머리를 땋아 드리우고, 단계라 하며 반드시 거기에 ‘수복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고 이를 ‘빈다’라고 하고 있어 여기에서는 댕기가 우리나라를 처음 여신 단군을 추앙하는데 생겨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Jee, 2017).
<북사> 열전에 백제 처녀는 머리를 뒤로 땋아 늘어뜨리고 부인은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에 얹었으며, 신라에서는 부인들의 머리를 땋아 머리에 두르고 비단과 진주 등으로 장식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끈으로 장식한 모습이 있어 삼국이 모두 댕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Jang, 2002). 한민족은 미성년 아이의 땋은 머리를 헝겊 등으로 묶어 고정시킨 ‘댕기’를 항시 착용했다. 고구려 청년은 머리 숱이 많으므로 두 가닥으로 머리카락을 나눈후 위로 올려묶었는데 이를 보고 총각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단조사고(檀祖事攷)에서 발해속고(渤海俗考)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 생일이 되면 그 부모가 단군사당[神祖廟]에 데리고 가서 ‘질병을 물리치고(袪疾病) 탈 없이 오래 살게(保壽命) 해주십시오’ 라는 기원문 글자 오색 포로 머리를 싸매서 끈으로 묶어 아이의 머리털에 매어 드리우는데, 이를 단계 혹은 단기라고 한다(Jee, 2017). 즉 발해 대진국에서도 댕기의 전통이 있었으며 이것이 댕기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근조선까지 이어져서 도투락댕기에 수(壽), 복(福), 귀(貴), 희(囍),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등의 길상문(吉祥文)을 수놓거나 금박으로 새겼다(Jee, 2017).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 땋은 머리와 댕기를 해왔다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단군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겨 대대로 지키고자 하는 바람이 전통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본다. 한복에는 머리에 묶는 헝겊 댕기뿐만 아니라 바느질로 봉제한 댕기들을 복식의 여러 군데 즉, 고름, 옷단, 귀주머니 테두리, 각종 장신구, 벨트, 노리개 등에 주렁주렁 매달았었다. 한국 여인들은 꿰매고 깁고 연결하고 묶는 ‘철(綴) 기법’ 이 뛰어나 복식에 이로써 장식을 하였다고 하듯이 부지런한 한국여성들은 바느질 솜씨가 훌륭했기에 이러한 댕기 장식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4.4. 바지
인류 역사에 스키타이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8세기경이며 이후 그리이스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서 <역사>에 스키타이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인들의 기원은 아시아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크림반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스키타이족은 고대문헌에 등장하는 사카족(색족)으로서 몽골 동쪽에서 기원하였다(Atwood, 2015). 중국과 언어구조가 완전히 다른 우랄어 알타이계 언어는 그 기원이 홍산 농경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연구가 최근에 유명학술지에 게재되었다(Robbeets, 2021).
고대 한국은 반농반목국가로서 유라시아까지 넘나드는 방대한 스키타이 문화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였다. 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기마민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스키타이족과 유사한 기마 궁사 기술을 지녔으며 세계 최초로 금속 등자를 발명하는 등 기마민족의 꽃을 피웠다(Kang, 2019). 세계 최초의 바지로 추정되는 유물은 중국의 서부 신장 타림분지에서 발견되었다(기원전 13세기). 이들은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었기 때문에 바지를 일찍부터 착용하였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는 기마병이 없었다. 기원전 4세기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에 의해 호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군대를 중심으로 먼저 바지를 착용하게 되었다. 진나라 때에도 직접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병이 아닌 말에 수레를 연결한 전차가 주력 기동 무기였다. 위만이 호복을 입고 북상투를 하여 번조선에 위장 침입을 한 것을 보더라도 한족과 한국 복식인 한복은 확실히 옷의 형태가 달랐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기마 농경 복합사회이었기 때문에 바지를 입어왔다는 사실이 많은 사료에 증명되어 있다. 한 무제는 고조선을 치고 나서 ‘이제 호(胡)와 예(禮)의 구분이 확실해졌다.’ 라고 하였듯이, 고조선은 호와 예가 동시에 모두 존재했던 국가였던 것이다. 중국의 고문헌에도 고조선을 “기마문화의 국가”라고 이해한 흔적이 있으며 <단군세기>에서도 흉노의 뿌리가 고조선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Shim, 2021).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으로, 항상 바지를 착용해 왔으며, 이는 심지어 여성들도 항상 바지나 속곳을 착용하는 복식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대 한국의 바지는 다리에 밀착되는 형태보다는 고구려 벽화 등 유물 자료를 통해 볼 때 바지통이 대체로 여유가 있는 궁고, 또는 너른바지 대구고 형태이며, 역시 기마생활에 적합하도록 바짓가랑이 사이에 당이 부착되었을 것이다(Kim & Chae, 2018). 하지만 이와 반대로 중국은 하퇴 부분만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바지를 입었으며, 밑이 막혀있는 대구고/궁고와는 달리 가랑이 부분이 개방된 개당고 바지를 착용하였다. 송나라 시기부터 가랑이 부분이 막힌 바지인 합당고가 등장하였으므로, 북방 민족의 바지와 한족의 바지는 그 형태 및 용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울라는 과거 고구려의 거점 지역으로 한국 문화의 특성을 공유한 부분이 많고, 또한 흉노의 주거지역이기도 하다(Chae, 2014). Figure 10a는 고구려벽화와 노인울라에서 출토된 복식의 평면도를 보면 가랑이에 풍성한 당(gusset)이 붙은 바지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몽골 노인울라 고분군 6호분 출토 된 흉노의 바지(Figure 10b)에서도 다리 사이에 삼각형의 덧단을 대어 봉제한 고(袴) 바지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화려한 자카드 곡선적 무늬의 錦비단과 색동비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허리대와 고름, 끈 장식이 많이 달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Figure 10c).
현재 야오족[요족:瑤族]이 현재 광동성 및 운남성 등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은 고구려에서 645년, 669년 681년 세 차례에 걸쳐 당나라로 집단 이동한 고구려의 유민이다(Kim, 2004). 유민의 광범위한 분포를 통해 살펴 볼 때, 고구려 전성기에는 그 영향력이 타림분지, 신장자치구까지 이르렀겠다고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야오족은 고구려의 궁고와 유사한 쪼우를 착용하고 있으며 또 짧아진 주름치마도 착용하고 있다. 이들이 태양을 상징하는 색을 흰색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중국이 태양색을 붉은색으로 표현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데 고구려 벽화에서 태양의 색은 붉은 색보다는 흰색이나 회색으로 많이 나타난다.
고대 중국의 바지 형태는 앞뒤가 터진 개당고를 입는 것이 상례이고(Figure 11), 우리 같은 앞뒤가 막힌 궁고를 입는 것은 예외에 속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 바지의 원류는 밑이 터진 형태였고 이는 겉옷보다는 속옷에 해당하는데, 밑이 터진 개당고를 입고 이를 가리기 위해 긴 길이의 옷을 겉에 입었다. 초기에 조무령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호복을 채택, 군사들에게 바지착용을 명령할때도 바지를 오랑캐의 옷이라고 생각하여 입기를 꺼려했고 큰 반대에 부딪혔었는데, 한족 사회에서 궁고(窮袴)는 하층민의 복식이었기 때문이다. 진한(秦漢)시기의 바지는 위로 길이가 연장되어 허리에 이르는 개당고인 대고(大袴)와 소제 이후에는 당이 막힌 궁고인 소고(小袴)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궁고/대구고는 바짓가랑이에 당을 대서 엉덩이가 풍성이게 보이는 바지를 말하며 이는 우리 한민족의 전통 복식이었다. 말을 탈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당, gusset가 붙어있으며 바지통 끝 발목 부근에서 끈으로 졸라매어 활동성을 높였는데, 현대의 한복에서도 대님으로 아랫단을 졸라매는 것이 남아 있다. 소매에는 소매각반을, 종아리에는 다리각반을 덧입어 사냥이나 승마 시 불편하지 않도록 하였다.
결론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뻗어, 한류, 즉 K-food, K-pop, K-beauty, K-drama 등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에 중국은 ‘한국 문화’에 대한 여러 소유권을 주장하고, 그중 한복에 대해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본 연구는 한복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 고유의 전통 의복인 한복의 특징을 조사하였으며, 중국 명나라 복식이 우리 고려시대 한복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다. 한복의 실루엣, 원단, 섶과 고름, 바지와 저고리, 주름치마 등 역사적 의미와 변천, 구조 및 제작방식 등의 분석과 문헌고찰을 통하여 한복의 뿌리를 파악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명나라의 복식은 고려양(고려복식의 유행)의 영향을 받아 명나라에서 한복이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 명나라시대 미인으로 추앙되었으며, 이로 인해 고려여인의 ‘짧은 길이의 반소매 저고리 한복’이 대거 유행했음을 유행했음을 장욱의 <궁중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Court costumes”, 2012). 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고려 패션이 명나라에서 크게 유행함으로 인해 세상이 미친 것 같다고 하였으며 홍치제가 고려양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한복은 투피스의 풍성한 형태이며, 한푸는 원피스의 슬림한 형태를 갖고 있으므로 완전히 다른 복식이다. 이 의복형태의 차이는 두 민족의 의복 실루엣을 결정하였는데, 복식 실루엣은 시간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는 최근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치파오’에 이르도록 오래 지속되었다. 또 우리는 바지와 속곳을 여러 겹 층층이 껴입어, 풍성한 실루엣을 나타내지만, 중국은 여러 겹을 착용하기보다는 옷 한두벌을 둘러 착용하는 형식이 많았으므로, 일자 형태에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실루엣을 나타내었는데 이러한 실루엣의 차이점은 두 복식이 서로 다른 형태에서 출발했음을 증명한다.
또 풍성한 한복은 비교적 뻣뻣하거나 고밀도의 ‘산둥실크’, 명주, 두둑직 원단을 많이 사용했지만, 한푸는 비교적 얇고 드레이프성이 좋으며 저밀도인 ‘차이나 실크’ 평직 원단을 많이 사용했다. 고대 마한은 옷에 수많은 금은 장식, 청동단추, 구슬 등을 옷에 붙였는데, 이들은 얇은 하늘거리는 원단에는 붙일 수가 없으므로 이를 통해서도 원단의 두께와 강직성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한나라 시기의 사(斜)직기는 한국의 수평형 직기와 달리 금(錦)직물 직조에 부적합하고, 한국의 수평형 직기는 화직기나 제화루와 밀접한데, 이것으로는 복잡한 곡선문양 자카드직 비단인 (經)錦까지도 직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원단에서 가능한 무늬와 색상에서도 차이가 크게 존재하였다. 또 결혼 전 남녀 머리에 매다는 댕기와 신분을 상징하는 색상이 다양한 허리대의 유무도 한복과 한푸의 차이점이다.
세 번째, 우리 한복은 기마·농경민족의 복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활동적인 주름치마, 상의 저고리와 하의 바지, 풍성함이 중요한 요소인데, 여러 폭의 주름치마, 소매 주름, 또는 허리선 아래에 주름을 잡아 붙인 철릭 등 풍성한 실루엣을 강조한다. 또 고도의 염색기술을 보여주는 화려한 색채감과 상하의 옷을 보색대비로 착용함, 색동 등을 우리의 한복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우리 한복의 필수품인 바지는 전국시대 중국 조나라 군사들에게 처음으로 모방 착용되었으며, 한복 바지의 형태는 중국의 ‘개당고’와 완전히 다르다. 말타기 편하게 가랑이 부분이 삼각형 막음새 모양을 이어붙인 고(袴)의 형태인 바지를 우리는 착용했지만, 중국은 아예 가랑이 부분이 개방되어 있는 개당고를 착용했는데 이는 용변의 편의성을 위해서 또는 부족한 봉제기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복은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저고리와 주름 치마의 풍성한 투피스 형태이며 저고리에는 섶을 달고 있지만, 한나라의 한푸는 랩어라운드 형식의 원피스 형태로서 옷본의 패턴 제도법 및 봉제 제작법 등이 완전히 다르다. 섶은 명나라 이전에는 중국복식 원피스 형태의 한푸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고도의 재봉기술로 제작하는 한복에는 고름이 많지만 이와는 달리, 재봉기술이 불필요한 남방 개방형 의류 및 권두의와 유사한 랩스커트 형태인 한나라 한푸의 경우에는 고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은 오호십육국, 북조, 수당, 원, 청나라 등 북방민족이 수 천년의 오랜 세월을 경영하였으므로 슬림한 오리지널 한푸에 북방의 요소가 혼합적으로 나타난 형태가 존재하였다. 근세의 차이나 칼라(북방 원나라 복식 요소)의 치파오(몸매를 드러낸 슬림한 실루엣)가 해당된다. 따라서 한푸란 한나라 복식 형태의 한푸 만으로 제한시켜야 한다는 주의점이 있으며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재, 고대 한복 관련 자료를 참고하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우리 유산 외에도 중앙아시아, 묘족, 베트남 등 관련 정보자료를 확대 수집하여 폭넓은 시각으로 연구해야 하겠으며 앞으로 관련 연구가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