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considered the performing arts culture with a focus on Palgwanhoe Ceremony and various stunt-songs and dance (Baekhee-Gamoo) from the Goryeo period as well as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performing arts’ costume for Baekhee-Gamoo shown in Palgwanhoe Ceremony. The Baekhee-Gamoo shown in the Palgwanhoe Ceremony included acrobatics, traditions from comic dramas, puppet shows, mask plays, and four musical troupe flowers of youth in the Silla Dynasty, who excelled in beauty, bravery and the military arts (Sasun-Akboo). These were performed on a wagon ship with dragon, phoenix, and elephant animal masks (Yong-Bong-Sang-Mageosun). The characteristics of performing arts’ costume for each performing arts are as follows. First, the general costume of the time was used for performing arts’ costume. There were no special costumes for performing arts and it was just transformed or added for the efficiency of acrobatics. Second, the reality was improved by focusing on the historical research on costume suitable for characters and background of events in the performing arts to clearly deliver the purpose of the ceremony and quickly arouse audience’s curiosity towards the performing arts’ costume for the tradition of comic dramas and puppet shos in the Palgwanhoe Ceremony. Third, magical powers and symbolism were expressed through masks and performing arts’ costumes. Palgwanhoe Ceremony aimed for magical powers that could protect weak human beings from threats and repel everything unfair while also symbolically showing the deified being through the performing arts’ costume.
서론연희복식은 흔히 민족과 문화, 그리고 연희라는 특성이 어우러져 만든 특별한 복식으로 간주되어 공연복식, 축제복식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들은 복식의 특성보다 연희, 공연, 축제 등 행위 및 행사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연희는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여흥을 쫓아 생겨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규칙과 체계가 점진적으로 더해진 자생적 성향이 짙다는 점에서 연희복식은 민족의 자생적 의생활문화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시대 팔관회 연희복식은 팔관회 의식이 삼국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발생하여 고려시대에 꾸준히 연행되었고, 포구락(抛毬樂), 사선무(四仙舞) 등 팔관회에서 연희되었던 가무희의 일부가 조선시대까지 전해진 까닭에 고려시대 복식연구의 또다른 접근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팔관회는 불교의식의 하나로써 사선악부, 용봉상마거선의 신라 고사를 신라의 화랑이 가무로써 연행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동맹처럼 추수감사적 요소를 포함한 조상제사의 성격을 지녀, 삼국시대 복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불교적 색채와 토착신앙적 특성을 지닌 연희복식의 면모가 잘 드러났을 것으로 보고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백희가무는 곡예(曲藝), 가면희(假面戱), 가무희(歌舞戱)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팔관회를 대표할 수 있는 주요행사였다.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행하라고 당부하였던 팔관회를 성종6년(987) 정지하는데 있어 이유를 팔관회의 백희가무 즉, 잡기 때문[21]이라고 밝힌 점은 팔관회에서 백희가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를 반증한다.
팔관회의 백희가무는 곡예, 우희(優戲), 가면희 등이 중심이 되는 백희와 음악 및 춤이 수반된 가무희를 포함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당악정재(唐樂呈才)인 포구락이 팔관회에서 연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1].
포구락과 같이 팔관회 가무희에서 착용되었던 연희복식의 일부인 악공복식과 무용복식은 내용의 방대함으로 인해 연구의 세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곡예, 우희, 가면희가 중심이 된 백희와 『고려사』에서 신라의 유습으로 팔관회에서 연희되었다고 언급된 사선악부(四仙樂府)와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의 가무희를 연희의 범위로 한정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고려시대 팔관회 및 백희가무를 중심으로 연희문화를 고찰하고 팔관회에서 연행된 백희가무 연희복식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팔관회와 연희1. 팔관회의 유래팔관회는 본래 인도의 팔계재(八戒齋)에서 비롯되었다. ‘팔관’은 불교 재가신도들이 지켜야 하는 여덟 가지 계율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를 알 수 있다[21].
신라 진흥왕은 통치이념으로 불교의 교리를 도입하였고 화랑을 조직하였다. 팔관회는 불교적 통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진흥왕에게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고대적 천신 관념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1].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팔관회는 호국적인 요소가 약화되고 천령, 오악, 명산, 대천, 용신 등의 토속신을 섬기는 것을 주목적으로 설행되었으나[2], 신라의 전통을 근간으로 계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파한집(破閑集)』에서 “태조가 등극하였으나 고국(古國)의 유풍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겨 이를 계승해 팔관회를 베풀고 양가의 자제 4인을 뽑아 예의(霓衣)를 입혀 궁정에 늘어서서 춤추게 하였다(我太祖龍興 以爲古國遺風尙不替矣. 冬月設八關盛會 選良家子四人 被霓衣列舞于庭.)”[29]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 팔관회는 궁예가 송악에서 팔관회를 설행하고, 태조 원년 11월(918) 팔관회를 계승하여 ‘훈요십조’를 통해 팔관회를 계속할 것을 유훈한 이래 고려시대 34대 475년 동안 성종22년(1003), 정종7년(1041) 등 몇 차례의 정지 외에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2. 팔관회 속 연희고려시대 사전(祀典) 체계는 유교, 불교 및 토속신앙과 관련된 전통의례가 국가의례로서 공존, 시행되었고[6] 팔관회도 왕의 주도하에 연희되었다. 팔관회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 이틀에 걸쳐 거행되었고, 10월에는 서경에서, 11월에는 개경에서 두 차례 개최하였다. 팔관회 백희가무 공연은 대회에는 없고 소회에만 있다. 소회는 대회와 달리 내국인만 참석한 가운데 산대(山臺) 위에서 사선(四仙) 등에 의해 행해지던 백희가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19]. 그러나 백희가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아 종류와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잡의 중동팔관회의(卷69志23禮11嘉禮雜儀. 仲冬八關會儀)에 의하면 “태조 원년 11월 유사(有司)가 태조에게 아뢰기를, ‘이전의 임금은 해마다 11월에 팔관회를 열고 복을 기원하였습니다. 그 제도를 따르소서’라 하였고 왕이 받아들였다. 마침내 구정(毬庭)에 윤등(輪燈)을 설치하고 네 모서리에 향등(香燈)을 일렬로 배열하였다. 또한 두 개의 채붕(彩棚)을 만들어 세웠는데, 각각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 넘었다. 그 앞에서 백희가무를 공연하였다. 사선악부, 용봉상마거선은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太祖 元年十一月 有司言 前主 每歲仲冬 大設八關會以祈福 乞遵其制 王從之 遂於毬庭置輪燈一座 列香燈於四旁 又結二綵棚 各高五丈餘 呈百戱歌舞於前 其四仙樂部 龍鳳象馬車船 皆新羅故事.)”[13]라고 백희가무가 팔관회에서 연희되었음을 기록하였다.
백희는 한대(漢代)의 잡기가 통칭되었고, 각저희(角低戱)라고도 하였다. 각저희는 『사기(史記)』에서 갖가지 활쏘기, 말타기 등의 경기를 뜻하였다. 가면희와 민간기예 및 서역의 음악, 무용, 곡예 등이 중원에 전래되어 백희의 내용이 풍부해졌고 곡예, 무술, 환술이 백희, 각저희에 포함되었다. 중국에서 산악(散樂)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들을 우리나라에서는 백희,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대희(山臺戱), 나례(儺禮), 나희(儺戱), 나(儺) 등으로 불러왔다[13].
1) 곡예(曲藝)『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시 연희들을 보고 지은 한시 <향악잡영(鄕樂雜詠)> 오수(五首)가 실려 있다. 이 중 금환(金丸)은 곡예의 종류로 “몸을 돌리고 팔을 흔들며 금환을 희롱하니…(廻身掉臂弄金丸…)”[34]라고 하여 바퀴던져받기, 공던져받기, 방울던져받기와 같은 놀이로 풀이된다.
『목은집(牧隱集)』에 실려 있는 이색(李穡)의 <산대잡극(山臺雜劇)>에는 곡예인 솟대타기가 언급된다. 또한 이색의 <구나행(驅儺行)>에서는 불토해내기, 칼삼키기와 같은 환술과 줄타기 등의 곡예가 묘사되었다[26].
2) 우희(優戲)우희는 골계희(滑稽戱), 배우희(俳優戱), 창우희(倡優戱), 주유희(侏儒戱) 등으로 일컬어지며, 익살스럽고 웃음을 자아내는 연희이다. 백희의 한 종목으로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판소리, 가면극, 재담, 만담 등에 영향을 끼쳤다[13]. <향악잡영>에 나타난 월전(月顚)에 해당되는데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고 머리털은 빳빳하며 팔소매를 걷은 군유(群儒)가 술잔을 다툰다(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群儒鬪酒盃)”고 하여 우스꽝스러운 난쟁이나 이를 흉내내는 배우를 묘사하고 있다. 『고려사』 충렬왕14년 기록에는 왕이 베푼 연희에서 상장군 정인경(鄭仁卿)의 주유희와 장군 간홍(簡弘)의 창우희가 확인된다[21].
3) 인형놀이괴뢰희(傀儡戱)라고 하는 인형놀이는 나무 등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인형을 움직이며 춤을 추게 하는 놀이이다. 고려시대 팔관회에서는 역대 공신들의 우상(偶像)을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더니 생시와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는 신라 진흥왕대 이후로 팔관회가 전쟁에서 죽은 위령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 팔관회도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을 추모하는 행사를 수용하여[13] 인형놀이를 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서 최승로(崔承老)는 팔관회에서 우인을 만드는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팔관회 폐지를 건의하였다. 성종대 이후 팔관회에서 왕의 사원거둥을 도입하여 전사자들의 우인을 만들어 위령하는 백희보다는 사원에서 불사를 통해 천도하고자 하였던 변화[19]를 통해서도 팔관회 인형놀이의 실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4) 가면희(假面戱)가면희 역시 <향악잡영>의 대면(大面)에서 살필 수 있다. 구나무(驅儺舞)의 일종으로 가면을 쓰고 역신을 몰아내기 위한 춤을 추는 무용이다. 속독(束毒)과 산예(狻猊) 역시 모두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연희이다[4]. 특히 산예는 서역,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사자무(獅子舞)로 보는데, 백제가 일본에 전한 불교와 관련된 기악에도 사자무가 있었고, 오늘날 한국의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수영야유, 통영오광대 등 가면극에도 각각 사자무가 전한다[13]. 인도에서 사자가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신수(神獸)로 사용된 이후 사자무가 천축국을 통해 중국으로 전래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 사자와 불교의 연관성[34]을 고려하면 팔관회에서 벽사의 의미로 길을 여는 역할[37]을 하는 사자무가 가면희로 연행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5)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은 가무희의 일종으로 보인다. 팔관회 백희가무 공연에서 핵심행사로 진행되었다[8].
그 동안 사선악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까지 전해진 사선무이거나 신라 화랑으로 구성된 가무단이 고려창건을 축하하는 팔관회에 참가한 것이라고 추정되었다[20]. 또한 신라시대 국선(永郞, 述郞, 南郞, 安祥)이 이끄는 가무단으로 사선악부는 화랑으로 조직된 4부의 악대라고 보았다[1].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22년 3월조(卷18世家18毅宗22年3月條)에는 “선풍(仙風)을 숭상해야 하며, 근래 양경(兩京)의 팔관회가 갈수록 옛 격식이 줄고 풍속이 쇠퇴하니 지금부터 거행하는 팔관회는 살림이 유족한 양반가를 미리 선택하여 선가(仙家)로 정하고 옛 풍속을 그대로 거행함으로써 사람들과 하늘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故祖宗以來崇尙其風久矣. 近來兩京八關之會 日滅舊格遺風漸衰. 自今八關會 預擇兩班家産饒足者 定爲仙家 依行古風 致使人天咸悅.)”[21]라고 기록하여 팔관회에서 사선악부는 4인의 화랑에 의한 가무희 즉, 사선무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용봉상마거선은 용, 봉황, 코끼리의 형상을 싣고 말이 이끄는 배 모양의 수레를 말한다고 본다[1]. 이는 신라의 풍습을 그대로 본 땄다고 전한다[12]. 팔관회에서 윤등, 향등을 밝히고 신성한 동물인 용, 봉황, 코끼리를 실은 거선을 끄는 말로 재현하는 것은 동남아 불교문화권의 유습으로 배를 타고 수로를 건너 부처님 세계로 열반하는 수희(水戱)의 일종으로 해석된다[24]. 팔관회에서는 수희를 지상으로 옮겨와 가무희로 표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은 용놀이로써 중국의 어룡지희(魚龍之戱)에 비교할 수 있고, 봉은 학무(鶴舞)와 같은 봉황무, 상은 『서경부(西京賦)』에 나오는 코끼리놀이처럼 일종의 가면희, 마거는 무륜기(舞輪技)와 같은 연희, 선은 연희에 배를 등장시킨 것으로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상연된 선유락(船遊樂)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20]. 그러나 무륜기는 바퀴를 던져 받는 백희의 일종이며, 선유락은 어부사(漁父詞)를 부르며 뱃줄을 당기고 낚시를 하는 등의 선유(船遊)의 의미가 강한 가무희이다. 마거를 무륜기나 선을 선유락으로 보는 것보다는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해 줄 동물과 수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씨름 그림에 나타난 말이 영혼을 인도하는 동물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11]와 일치한다. 따라서 용봉상마거선은 사선악부의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가운데 배 위에서 신성한 동물의 가면을 쓰고 가무희를 구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팔관회 연희복식의 특성1. 팔관회 연희복식1) 곡예 복식곡예의 종류인 방울던져받기, 바퀴던지기, 공던져받기, 솟대타기, 나무다리걷기, 줄타기, 칼부림재주 등의 연희는 저고리, 바지를 기본복식으로 하였다.
고려시대 저고리는 의, 삼으로 지칭된다. 의(衣)는 겹옷을, 삼(衫)은 홑옷을 가르킨다. 그 중 유는 단의(短衣), 유의(襦衣)를 제외하고 긴 두루마기형 복식을 말하며, 착삼, 단삼이 저고리형 복식을 나타낸다[23]. 특히 『포은집(圃隱集)』에는 단의(短衣)가 말갈(靺鞨)족이 착용하는 복식으로 북방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15]. 팔관회에서 연희 담당층은 북방 유목민 계통의 수척(水尺), 재승(才僧)계통, 서역(西域)계통, 세습무계(世襲巫系)의 무부(巫夫) 등으로 간추릴 수 있다[13]. 특히 수척은 조선시대 백정으로 고려시대 이전부터 유입되었던 북방 유목민의 주업이었고, 연희를 겸하여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방 유목민 중 하나인 말갈족이 착용하였다는 단의는 짧은 웃옷으로 당시 하류계층에 속하여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연희자 계층의 보편적 복식이었던 것 같다. 이런 단의가 곡예복식으로 입혀졌을 개연성은 높다. Table 1 중 [A]에 제시된 수산리 고구려 고분벽화의 나무다리걷기 곡예를 하는 모습에서도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은 저고리 착용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바지는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도경(高麗圖經)』,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 고(袴), 말고(襪袴), 궁고(窮袴), 관고(寬袴), 독비곤(犢鼻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바지는 탱화, 벽화, 초상화 등을 통해 확인되나 상류층의 바지 착용모습은 찾기 어렵다. 특히 독비곤은 『동국이상국집』에서 이규보와 함께 술 취한 나무꾼이 착용한 것으로 나타나며, Table 1 중 [B]의 장천1호분 고구려 고분벽화 씨름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와 같은 그림에서는 고려 군인의 바지 착용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바지는 삼국시대 양식과 유사하며,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과도 대동소이하다[25].
단의, 독비곤에서 알 수 있듯이 길이가 짧고 활동성이 가미된 복식이 곡예복식으로 차용되었다고 본다. 곡예복식으로 독비곤과 같은 짧은 바지를 입지 않고 바지길이가 긴 경우에는 바지통을 여미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었을 것인데, 조선시대 행전과 같은 부속품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Table 1의 고구려 고분벽화인 수산리고분[A], 안악3호분[C]을 통해 확인되는 연희복식은 바지 아래 부분을 좁게 여민 형태이다. 이런 경우 바지에 행전뿐만 아니라 화(靴)나 경의(經衣) 등이 활용되었다. 또한 『고려사』에 말두고(襪頭袴), 말고(襪袴)는 연희의 일단을 담당하였던 승려가 착용한 기록이 있어, 버선이 달려 활동에 편리한 바지가 연희복식으로 착용될 수 있었다. 저고리는 활동을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 아니라 일상복보다 짧은 소매의 저고리가 연희복식으로 제작,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6].
연희자의 관모로는 건(巾)이 주로 착용되었다. 고려시대 건은 오(烏), 조(皂), 자(紫), 백(白)색이며, 문라(文羅)를 비롯하여 첩(氎), 갈(葛), 륜(綸) 등 직물로 만들어졌다. 승복의 쓰개, 의위복(儀衛服)과 함께 쓴다. 삼국시대 이래 말을 타는 사람, 악기를 든 사람, 경기인, 시종 등 낮은 계층 및 공연을 하는 연희자의 관모로 건이 착용되었다[16]. 한편 건과 함께 모(帽)는 직물류뿐만 아니라 모피류가 모두 사용되고 의위복과 더불어 무용복식으로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 모는 건에 비해 일상복에 착용된 포괄적 의미의 쓰개류로 지칭되었고[23], 동절기 행사로도 행해졌던 팔관회에서 방한용으로 이용되었다고 본다.
또한 복두는 귀한 예물로 인식되었고 주로 관직에 복귀하는 예물이나 학문을 장려할 때, 국로(國老)를 위한 연희의 선물 등으로 활용되었으나[30] 고려후기에 이르러 노비계층까지 널리 착용되는 등 일상적인 쓰개로 일반화 되었다[21]. 복두는 고려시대 무관의 관모로 『고려사』 여복지 의위(儀衛)복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의위대(儀衛隊)는 신분이 높은 장군이 갑주를 착용하였고, 갑옷을 입지 않으면 복두나 모자를 착용하였다. 복두는 방각(放角), 입각(立角), 삽각(揷角) 순으로 구분되었는데, 의위대가 착용한 모자는 각(角)이 없는 복두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금분이나 금직 등으로 신분을 구별하였다. 그밖에 자라관(紫羅冠), 무변관(武弁冠), 이두관(貍頭冠), 평건책(平巾幘), 말액(抹額) 등이 고려시대 군사계급이 착용했던 관모로 나타난다. 특히 말액은 발해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벽화 시위(侍衛)의 모습이나 고려불화의 시왕도에서 살필 수 있다[6]. 이에 곡예의 하나인 칼부림재주를 하는 연희자의 관모로 신분이 낮은 무관이 썼던 삽각과 같은 복두 혹은 각이 없는 모자 등이 착용되었다고 본다.
무관의 관모를 연희자가 차용하는 예는 칼부림재주과 같이 무풍적 요소가 가미된 연희에서 볼 수 있다. Table 1의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3호분의 칼부림재주 연희자[C]는 고리자루 긴 칼과 굽은 활 같은 것을 쥐고 있다. 복식은 저고리, 바지의 일반복식 차림이지만 관모는 무관임을 드러낼 수 있는 고구려시대 관모인 책(幘)을 쓰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검기무에서는 광해군 10년부터 고종 32년까지 칙령이 반포되어 군복으로 착용된 무관의 관모인 전립(戰笠)을 착용한다. 고려시대 팔관회의 칼부림재주 역시 무관이나 시위자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고려시대 무관의 관모를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2) 우희 복식팔관회에서 우희는 전문적 연행집단을 통해 다양한 레퍼토리 및 웃음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난장이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관료가 술에 취해 보여주는 해학적 또는 풍자적인 모습은 팔관회에 함께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였다[14].
팔관회에서 연희되었을 우희의 모습은 Table 1에 제시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양주별산대놀이, 봉산탈춤, 통영오광대의 샌님 [D, E]등에서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즉, 해학의 대상이었던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그들이 착용한 복식인 도포, 전복, 복건, 유건, 흑립, 부채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14]. 팔관회 우희복식 역시 연극적 고증을 위해 고려시대 보편적 상류계층의 복식이 착용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겉옷으로 알려진 포는 왕이하 일반남녀가 광범위하게 착용하였고, 포(布), 저(紵), 사(紗), 라(羅), 금(錦) 등 다양한 직물로 만들어져 단령포와 직령포를 모두 포함하여 이른다[21]. 그 외 사(紗), 주(紬), 저사(紵絲), 직금(織金)과 같은 고급직물로 화려하게 제작된 화려한 오(襖), 고려시대 문인들이 애용하였던 학창과 심의, 고려 원 간섭 이후 등장하는 첩리와 답호와 같은 겉옷이 있다. 관모로는 건이 일상복으로 착용되었고, 고려시대 문집에는 이규보, 박인범 등 문인이 복건을 쓴 것으로 확인된다[23]. 팔관회 우희 복식으로 상류계층을 상징할 수 있는 직령포와 같은 겉옷과 복건 등이 우희의 풍자와 해학을 위해 허용되어 착용되었을 것이다.
3) 인형놀이 복식인형놀이 복식 또한 우희 복식과 같이 복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을 구체화 시킨다. 팔관회의 위령제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인형놀이에 적용된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며 대부분 나라를 위해 공훈을 남긴 공신으로 각각의 신분에 따라 복식이 고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인형놀이에 활용된 복식은 고려시대 관복에 해당된다.
앞서 언급된 신숭겸과 김락 인형놀이는 예종15년(1120) 10월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에서 이를 보고 예종이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추도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또한 신숭겸, 김락 두 장수의 우상(偶像)을 만들고 추모한 것은 팔관회가 처음 열렸을 때부터 존재하였던 중요 연희였다[33]. 신숭겸과 김락은 고려 건국공신으로 견훤(甄萱)의 군사와 싸울 때 대장(大將) 신숭겸이 왕복을 입고 왕으로 위장하고 원보(元甫) 김락과 함께 전사(927년)하였던 인물이다. 무관이었던 두 인물의 신분에 따라 우상에 군복을 입혔을 가능성이 있으나, 신숭겸은 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신숭겸과 김락의 아들을 원윤(元尹)으로 삼는 등 예를 다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군복보다는 공복과 같은 관복으로 입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숭겸의 직위였던 대장군은 관직명으로 고려시대 광종11년(960)의 공복제도에 근거하여 종3품 무관직이므로 신숭겸 우상의 관복은 자삼(紫衫)에 해당된다. 또한 원보는 관계명으로 정4품에 해당되며 김락의 우상 역시 관복제 중 자삼이어야 한다. 두 인물이 고려 초기 인물임을 감안하여 신라 법흥왕대 백관의 관복색을 살펴보더라도 자의(1-5품)와 일치된다. 특히 자색은 사후 태자대부로 추증되었던 Table 1의 강민첨(姜民瞻, 963~1021) 상[F]에서 확인되듯이 관복색으로 항상 가장 높은 품계 집단에게 허용되었으며, 왕과 최측근으로써 본인 뿐만 아니라 왕의 위엄을 세우고 왕 다음 최고의 신분임을 표시하는 것[30]이므로 우상의 복색에 합당하다. 또한 Table 1의 최유선(崔惟善, ?~1075) 상[G]과 같이 4품까지만 허용되었던 유각(有角) 복두를 함께 착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4) 사자무 복식<향악잡영>의 오수에 나타난 산예의 사자는 머리와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어 부처의 자비심을 받아들이도록 교화된 모습이면서도 백수의 왕으로서 풍모를 간직한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34]. 단순히 사자의 형상과 동작을 모방하여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닌 벽사의 의미로 연행된 팔관회의 사자무는 맹수로서의 사자의 모습을 가급적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복식이 기능하였다.
13세기 일본에 전해진 기악무를 기술한 『교훈초(敎訓抄)』에 따르면, 사자무는 사자가 머리를 흔들거나 직립하는 자세로 높이 뛰어 오르고 입을 아래로 벌리고 땅에 엎드리는 식의 모습을 반복하여 연기하는 모습으로 볼 때 보통 2인이 사자의 앞머리 부분과 뒤꼬리 부분을 나누어 맡았다[18]. Table 1의 그림[H]에 제시한 것처럼 조선시대 <화성낙성연도(華城落城宴圖)>의 사호무(獅虎舞)에서 사자는 커다란 혀를 내밀어 먹이를 먹으려는 모습이나, 봉산탈춤, 하회별신굿탈놀이, 통영오광대, 북청사자놀이[I] 등에서도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팔관회에서 연행되었을 벽사의 기능을 하는 사자무는 여흥을 위한 당대(唐代) 궁중연향악의 하나인 태평악에 속한 오방사자무의 규모와 복식에서 그 차이가 난다. 2인이 연출하는 사자와 달리 오방사자무는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털가죽을 이어 가짜 사자를 만들고 털이개를 들고서 사자와 익숙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연출한다. 사자 한 마리당 12명이 붙어서 화려한 옷에 붉은 털이 개를 들고 머리에 붉은띠를 둘렀다[18]. 반면 사자무는 Table 1의 그림[I] 북청사자놀이와 같이 역귀를 물리치는 사자의 용맹성이 부각된 사자가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저고리, 바지 차림의 연희자 2인의 복식은 강조되지 않았다.
5)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팔관회에서는 국선을 대신해 양반가의 자제 4인을 뽑아 예의(霓衣)를 입혀 열을 지어 뜰에서 춤추게 하였다. 또한 『보한집(補閑集)』에서는 “동도(東都)는 본래 신라 도읍이다. 옛날 사선이 있어 각각 천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제도가 성행하였다(東都本新羅古有四仙各領從千餘人歌法盛行)”[3]라고 하였다.
이렇듯 팔관회의 백희가무는 신라 유풍인 선풍(仙風)을 행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공연이 행해졌고, 이는 연등회를 비롯한 기타 공연에서 백희잡기를 공연하는 사람이 산대악인(山臺樂人)인 것과 다르다[8]. 따라서 팔관회에서는 사선악부를 중심으로 신선의 복식, 상류계층의 복식 등이 연희복식으로 착용되었다.
팔관회에서 사선악부에 등장하였던 젊은 자제들은 예의를 입었다. 예의는 양가자(良家子), 천녀(天女) 등이 착용하는 선녀의 옷을 의미하며[29], 『고산유고(孤山遺稿)』에서는 “가시덤불도 날개 돋아나 예의를 휘날리고…(荊榛羽化霓衣振…)”라는 시 구절과 함께 “예의(霓衣)가 다른 판본에는 예상(霓裳)으로 되어 있다(霓衣一本作霓裳).”라는 편자(編者)의 해석이 붙어 있다[40]. 예의는 도교적 관념이 표현된 복식으로 일반복식과 다른 형태로 형상화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대(唐代) 서역에서 들어온 무악(舞樂)으로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가 성행하였다. 예상우의무의 의상은 ‘고계에 보요관(步搖冠), 주보식(珠寶式) 떨잠을 치장하고 공작이 날개를 펼친듯한 우의를 비취와 진주를 가지고 치장하여 입고 담채색이나 은백색의 치마에 영건을 둘렀다[10]’라고 하였다. 백거이(白居易)의 <예상우의무가(霓裳羽衣舞歌)>에 표현된 시에는 “상 앞의 춤추는 사람의 얼굴은 옥과 같으며 세속의 옷을 입지 않네. 홍상(虹裳)에 하피를 입고 보요관을 쓰고, 전영은 겹겹이 드리워져 있고, 패옥은 찰랑찰랑 소리나네(案前舞者顔如玉 不着人間俗衣服 虹裳霞佩玉步搖冠 鈿瓔纍纍珊珊).”라고 예의에 대해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홍상’은 ‘예상’으로 ‘예(霓), 홍(虹)’은 원래 음양이 기운을 교차한 것이라고 하여 ‘홍’은 햇빛과 물의 기운이 서로 비추는 것이고, ‘예’는 홍의 푸르고 붉은 빛에 속하는 것으로 백색이다[32]. 예상우의무는 유, 불, 도 합일의 악무[38]임을 감안하면 사선악부의 복식은 고려시대 일반복식이 아닌 특수복식이 입혀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선악부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는 사선무 복식은 Table 1의 그림[J]와 같이 조선시대 순조29년(1829) 기축(己丑) 『진찬의궤(進饌儀軌)』 <자경전진찬반차도(慈慶殿進饌班次圖)>에서 확인된다. 사선무의 무동(舞童)은 기축년에 복두(幞頭), 남포(藍袍),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 홍야대(紅也帶), 흑화(黑靴)를 입었다. 임인년에 무동은 화관(花冠), 홍화주의(紅禾紬衣), 백단의(白單衣), 홍화주상(紅禾紬裳), 홍남야대(紅藍也帶)를 착용하였다. 여령(女伶)은 녹초단삼(綠綃單衫), 안은 남색상(藍色裳), 겉은 홍초상(紅綃裳), 화관(花冠), 초록혜(草綠鞋), 오색한삼(五色汗衫)으로 일반 여령복식과 같다. 이러한 사선무 복식은 조선시대의 일반복식에서 도입된 형태이며 음양의 색인 청, 홍색의 조화 및 오행색인 적(火), 청(木), 황(土), 흑(水), 백(金)이 조화를 이뤄 사선악부에서 착용된 예의와는 차이가 있다. 사선무의 연희 담당층이 화랑에서 무동, 여령으로, 신라 산신제의 기능이 조선시대 유교사상에 부합되지 않았던 점 등이 복식변화의 요인으로 작용되었다.
용봉상마거선은 백수만연지희(百獸漫衍之戱)로 신들이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 신락(神樂) 놀이였다. 그리고 마거와 배가 활용되어 연희공간을 성역화 함으로써 세속공간에 제의적 축제를 펼쳤다. 특히 『서경부』에는 곰, 호랑이, 원숭이, 큰 공작, 흰 코끼리,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 모습이 적혀 있는데, 신수(神獸)들을 이끌고 나와 인간 세상을 정화하고 복을 주는 장면의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신선의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묘기를 행하여 세상을 정화하는 주술적 신악무(神樂舞)라고 할 수 있다[35]. 이를 짐작할 수 있는 Table 1의 그림[L]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영접 행사의 연희장면을 그린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로 산대(山臺) 즉, 무대를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설치하고, 낚시질 하는 신선, 춤을 추는 선녀 인형, 원숭이 인형, 붉은 옷을 입은 인형 등을 배치하여[13] 신선이 사는 세계를 무대에 옮겨와 연희하였다.
따라서 용봉상마거선을 당시 동물가장가면희로 본다면 용, 봉, 상의 신성한 동물가면을 쓰고 음악과 춤을 곁들인 백희가무의 형식이 마거 위에서 재현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공연되었던 어룡만연희의 모습은 조선시대 성종19년(1488)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동월(董越)이 쓴 시 <조선부(朝鮮賦)>에 나타난다. <조선부>는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고려시대 팔관회와 시대적 간극이 있으나, 용, 봉, 상 가면희가 독자적 연희로 전승되지 못한 상황에서 팔관회에 연희되었을 용봉상마거선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부>에서는 어룡뿐만 아니라 코끼리연희, 봉황희가 함께 설명되었다. 어룡은 입에서 금괴를 토해낸다는 함리(含利)라는 동물이 비목어(比目魚)로 변하고 물보라 속에서 길이가 긴 용으로 변하는 연희이다. 여기에는 봉황희와 함께 연희되는데, 봉황희는 공중에서 천천히 춤을 추며 내려오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Table 1의 조선시대 궁중정재로 전해지는 학춤[K]과 유사하였을 것이다[13]. 코끼리연희 역시 <조선부>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썼다고 하여 가면을 착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용봉상마거선에 등장하는 신수들의 가무희는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가면과 복식의 예술적 표현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악학궤범(樂學軌範)』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에 기록되어 현재에도 전승되는 가무희 중 학무[K]는 실제와 거의 흡사한 학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백학과 청학으로 제작되었는데, 백학의 경우의 “(목) 안쪽은 나무를 사용하고… 흰 거위깃을 붙인다. 날개는 황새의 날개를 쓰고, 꼬리는 검은 닭꼬리를 쓰며 청색부리를 단다. 양 무릎은 홍상을 입고 홍말과 홍목족을 신는다. 흰색 천을 배아래 드러누워 무릎을 가린다(內用木頸…白唐贋羽付之 翼用觀翼羽 尾用黑鷄尾靑嘴 兩膝着紅裳紅襪紅木足 裁白布垂腹下蔽膝).”라고 되어 있다. 학의 조형과 색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며, 용봉상마거선에 나타난 신수들의 복식 역시 사실적 기법을 통해 가장(假裝)의 외형과 심미적 특성을 드러냈을 것이다[7].
2. 팔관회 연희복식의 특성고려시대 팔관회에는 백희가무를 중심으로 최고수준의 놀이문화가 집약된 양상이다. 팔관회 속 연희복식은 놀이유형, 연희 담당계층에 따라 시각적으로 놀이를 구분 짓고, 놀이의 의미와 역할에 몰입하게 해 주었다. 또한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적 측면이 반영되고 의례적 기능이 수반된 특징이 있다.
구체적으로 팔관회 연희복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당시대의 일반복식이 연희복식으로 활용되었다. 놀이를 위한 복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곡예의 효율성을 위해 변형되거나 첨부되었을 뿐으로 생각된다. 놀이가 생활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서역에서 산악, 백희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중국에는 유사한 종목의 연희들이 일부 존재했다. 우리의 경우도 중국처럼 자생적인 전통의 백희가무가 있었다. 방울던져받기, 줄타기, 솟대타기, 나무다리걷기 같은 곡예와 우희 등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보편적으로 발전된다[13]. 따라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곡예와 복식의 양상이 팔관회에도 전승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연희자가 곡예를 위해 일상에서 착용하였던 저고리와 바지를 짧은 소매와 바지로 변형시켜 활동성을 살렸듯 팔관회의 곡예 복식도 고려시대 일반복식이 연희복식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칼부림재주 등에서는 무풍적 느낌과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하류층이었던 연희 담당자에게 무관의 관모를 허용하는 변형의 특성도 보인다.
둘째, 우희, 인형놀이 등의 연희복식은 고증이 중시되었다. 팔관회에서 의례를 통해 인간만사 희노애락의 감정, 의례의 장엄성, 풍자적 희극성, 공덕의 찬양, 특별한 시대적 사건들을 가, 무, 악, 연극, 백희 등으로 연희할 때 이들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복식의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는 표현이 필요하였다[9]. 팔관회가 군민동락하는 행사로 관람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조상제의적, 위령적 목적을 지닌 국가 의례행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면 팔관회에서 착용되는 연희복식은 연희자의 역할을 제대로 표현하게 하고 의미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관람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의례의 목적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팔관회에서 연희된 우희, 인형놀이의 연희복식은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배경에 맞는 복식고증을 통해 사실성을 높였을 것이다. 현대에도 민속축제, 재현행사 및 대중매체에서 복식고증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듯 우희, 인형놀이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의 사회적 신분이나 직위, 시대에 대한 검증을 통해 일반복식이 연희복식으로 고증되었을 것이다.
셋째, 가면 및 연희복식을 통해 주술성, 상징성을 표현하였다. 팔관회는 불교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도교, 민속신앙적 특성이 복합되어 있다. 팔관회의 개최시기는 음력 11월인데, 이는 태양이 약해지는 계절로 신께 소원을 빌고 긴 겨울을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비는 토속신앙과 관계가 있다[39]. 또한 선풍을 숭상하여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을 연희하였고, 왕이 사원에 거둥하여 위령제를 지내는 불교적 신념체계를 보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팔관회는 인간이 미약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위협적인 것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부정한 것을 물리쳐 주길 바라는 주술적 목적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주술성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팔관회에서는 백희가무 즉 놀이로서 응집시켰고 연희복식을 통해 상징화하였다. 사선악부의 예의나 사자, 용, 봉, 상 등의 가면을 통해 신과 동격으로 가장(假裝)시킴으로써 주술적인 힘을 갖는다고 믿었으며 연희복식으로 통해 초자연적인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본다.
결론고려시대 팔관회 및 놀이를 중심으로 놀이문화를 고찰하고 팔관회에서 연행된 백희가무 연희복식의 특성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팔관회의 놀이 백희가무는 곡예, 우희, 인형놀이, 가면희, 사선악부와 용봉상마거선 등이 연희되었다고 보았다. 곡예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자생적, 민족적 백희 종목인 방울던져받기, 바퀴던져받기, 공던져받기, 솟대타기, 줄타기 등으로 구성되었고, 수박희, 각저희, 칼부림재주 등이 백희가무로 연희되었다. 우희는 전문 연희자에 의해 행해진 풍자나 해학을 위한 연희로 보았다. 인형놀이는 우상을 만들어 공신을 위로하는 형식이었고, 가면희로는 사자무가 공연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사선악부는 사선을 상징하는 연희자들이 음악과 춤을 행하는 형식으로, 용봉상마거선은 수레 위에 만들어진 배에서 신수를 상징하는 가면을 쓰고 가무희를 연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팔관회의 백희가무에서 착용된 연희복식의 특성은 첫째, 당시대의 일반복식이 연희복식으로 활용되었다. 놀이를 위한 복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곡예의 효율성을 위해 변형되거나 첨부되었을 뿐으로 생각된다. 일상에서 착용하였던 저고리와 바지를 짧은 소매와 바지로 변형시켜 활동성을 살렸고, 칼부림재주와 같이 극적 표현을 위해 무관의 관모를 신분에 관계없이 사용하였다고 보았다.
둘째, 우희, 인형놀이 등의 연희복식은 고증이 중시되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관람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의례의 목적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팔관회에서 연희된 우희, 인형놀이 복식은 놀이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배경에 부합할 수 있도록 복식고증에 치중하여 사실성을 높였다고 보았다.
셋째, 가면 및 연희복식을 통해 주술성, 상징성을 표현하였다. 팔관회는 인간이 미약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위협적인 것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부정한 것을 물리쳐 주길 바라는 주술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이에 그 상징성을 드러냈다고 보았다.
팔관회 연희복식에 대한 연구는 팔관회에서 연행된 백희가무의 종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복식전공자가 백희가무의 종목을 추적해 가는 쉽지 않는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오판한 부분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백희가무의 연희복식을 규명하는 과정 또한 고려시대 연희복식자료가 풍족하지 못한 관계로 전후시대의 자료에 바탕을 두어야 했던 연구의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사에서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던 팔관회 연희복식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였다는 데 의미를 두고자 하며, 후속연구에서는 백희가무의 연희자뿐만 아니라 가무희의 악공, 무인의 팔관회 연희복식를 통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고자 한다.
Declaration of Conflicting InterestsThe authors declared that they had no conflicts of interest with respect to their authorship or the publication of this article. AcknowledgmentsThis study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NRF-2012S1A5B5A07037240)
Table 1.Figure A, B, C. Reprinted from compilation committee of Joseon properties and heritage sites’ picture book [5]. Figure D, E. Reprinted from Kim [17]. Figure F, G. Reprinted from Lee, et al. [27]. Figure H, I, L. Reprinted from Jeon [13]. Figure J. Reprinted from national gugak center [31]. Figure K. Reprinted from Lee [28]. ReferencesAn, J. W. (1997). Sakra belief of Buddhism and King’s power in the reign of King Jin-Pyong. The Korean History Education Review, 63, 6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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